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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

[사보루]무제 To.지밀언니

고등학교 졸업을 끝으로 20살의 자유를 만끽한다는 말을 예전부터 믿지 않았다. 주위에서 놀자판이 열려도 난 죽어라 책만 들여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으니깐. 보기만 해도 울렁증 걸릴 것 같은 외국어를 대략 10시간 이상 바라보자니 눈 앞이 침침하고 수분마저 말라갈 것 같았다. 내가 고딩 때도 이렇게 미친놈처럼 공부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대동맥.”

“Aorta. 심장에서 나온 피를 온 몸으로 보내주는 혈관.”

관련된 용어 3가지 풀네임.”

“Ascending aorta(오름대동맥)...”

 

죽어라 외워도 안 외워지는 단어들을 아직도 붙잡고 있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이유는 여기에서 엿볼 수 있겠다. 내가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이 큰 흠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의 불씨를 끌어 모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을 끼얹는 교수님이 정말 원망스러웠다.

 

루피.”

“...”

지금 사표낼래, 나중에 인턴 1년 더 할래.”

 

인턴 1년 더 하는 것도 싫고 사표 내는 것도 싫다. 라는 말을 꺼내면 난 오늘부로 이 교수의 현란한 말솜씨에 놀아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들어볼 필요도 없이 그 뒤에 붙는 말은 여러 가지 타당한 이유를 댄 잔소리다. 어떻게 3개월이 지나도록 왜 의학용어를 안 외우면 안 되는 이유를 한 가지도 겹치는 일이 없이 술술 내뱉을 수 있는거지. 여기서 태클을 걸었다간 휴게실에 저녁 늦게까지 잡혀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 누가 모르겠습니까,

 

.. 열심히 하겠습니다.”

내일까지 관련 용어 풀네임 5가지 50번씩 적어 와.”

“Descending aorta(내림대동맥), thoracic aorta(가슴대동맥), abdominal aorta(배대동맥)!!”

이미 늦었어.”

 

정수기에서 물 뽑고 있다가 뜬금없이 이딴걸 물어보면 그 누가 대답을 제대로 하겠습니까. 옆에서 키드가 혀를 끌끌 차는게 들린다. 저 새끼는 내과의 안 만나러가고 왜 여기 있는거야. 갑자기 두통이 밀려오는데 한 간호사가 부리나케 우리 쪽으로 뛰어 오는게 보였다.

 

사보 교수님! 응급환자..!”

 

흉부외과의는 그 중에서도 지독히 괴로운 싸움을 해야만 했다.

 

어쩔 수 없잖아.”

그래도 물마시고 있는데 다짜고짜..”

 

응급환자 와서 더 물어보려던거 참은거야.”

극악무도해 진짜.”

 

정형외과도 아니고 다른 전문이 아닌 흉부외과는 사람의 생명과 바로 연관되어 있다. 그 때문에 차기에 인턴이 될 다른 동기들보다 더 많이 굴려지는 편이였다. 그래도 그렇지 보통 이상의 감정을 나누는 사람에게 이렇게 잔인할 정도로 나를 조여 올수도 있는가 싶었다. 개인 룸으로 들어오자마자 톡톡. 잔뜩 풀이 죽은 나를 위로 해주었기에 토라져있었던 마음은 그나마 나아졌다. 사실 공과 사의 구분이 뚜렷한 사보가 고마웠고 좋았지만 그렇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많이 화났어?”

“......”

 

턱 밑으로 잡아오는 손길을 굳이 피하지 않았다. 달콤한 망울이 끝을 살짝 마주대고는 수줍게 떨어졌다. 그 끝이 못내 아쉬워 사보의 목 뒤로 손을 두르려던 찰나였다. 문이 열리고 그대가 들어오죠. 공중에서 멈춘 팔을 내릴 새도 없이 다급하게 열린 문을 쳐다보았다. 사보 역시 처지는 나와 비슷해보였다. 서로 갈 길 잃은 손이 허둥지둥 제자리를 찾아갔다.

 

.... 교수님! 지금 빨리..”

 

사보의 시선이 나에게로 맞춰졌다. 사실 눈빛만 봐도 지금 그의 감정상태가 어떠한지 알 수 있었다. 어느 한 사람의 생명의 불씨가 메말라갈 수도 있는 상황에 선택지는 이미 정해져있었다. 머리를 헝클어주는 손길을 마지막으로 사보는 다급하게 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 하필 지금 오십니까. 뽀뽀도 못하게 더 빨리 오시지. 뛰어나가는 뒷모습이 너무 원망스럽다가도 대견해보였다. 그래, 나중에 방해하는 사람도 없이 휴가 때 밤새도록 죽어보자 우리. 주변에 널브려져 있는 펜을 아무거나 집어 아직 못 다한 숙제를 시작했다.







이 마무리를 어찌하옵니까.. T^T

너무 늦었지만 지밀언니 생일축하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