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의 세월은 본진은 물론 적진에게도 큰 변화를 불러 모았다. 억울하게 희생된 무기 세공업자가 바친 최후의 무기는 레오니다스(Leonidas)의 화력을 정점으로 올려주었다. 하지만 거듭된 세력 과시로 이내 내부 반란을 초래했다. 그로 인해 당연히 내부 상황은 극악으로 치닫았고 40년만의 지도자 교체 시즌마저 겹치고야 말았다. 점점 기울어져 위태해진 조직이 자리를 안정하게 잡을 때 까지 지도자를 유지하기 위한 반발도 일어났지만 후보들의 거센 반발로 인해 무산이 되어버렸다. 사실 페르시아(Persia)의 본 작전도 이 교체시즌을 바라보고 진행된 계획이었지만 예정에 없던 쿠데타가 일어난 지금이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잠입하고 있는 요원 덕에 손쉽게 정보를 캘 수 있었다.
일어난 훤하니 펼쳐진 지도를 한참을 들여다 보다 일그러진 미간을 풀며 일어섰다. 여기저기 얽혀있는 빨간 표식이 오랜 고뇌의 흔적으로 새겨졌다. 펜을 신경질적으로 던져대고는 손가락으로 목적지를 짚어대며 입을 열었다.
“소피아(Sofia)를 친다.”
“무조건 3일 만에 끝내야 하는거 알고있지?”
“당연하지. 소탕하면 바로 베오(Beo)를 거쳐서 적진 본부로 간다.”
물론 이치마츠가 후방 지휘만 잘해준다면 이틀내로 끝낼 수도 있어. 산소를 크게 들이마시며 오른쪽 귓볼에 달린 빨간 귀걸이를 이리저리 굴렸다. 촉촉해진 눈가를 두어번 비벼대고는 쵸로마츠에게 시선을 향했다.
“방금 닿은 연락으론 아마 내일 돌아올거야. 소박하게 파티를 준비하자고.”
“알겠어.”
그나마 무거운 짐을 덜 수 있는 혈연을 반기는 파티는 소소하게나마 해주는 것이 예의다. 밤새 이어진 토론 때문에 감기는 눈꺼풀을 겨우 떼어내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시간을 보니 넉넉히 네 시간은 눈을 붙일 수 있겠다. 잠을 청하러 떠난 오소마츠를 제외한 네 명도 쏟아지는 잠을 주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소박한 파티는 어떻게 하라는 걸까. 규모를 이래 짐작할 수 없었다. 가뜩이나 감긴 눈이 더 잠기려한다. 얼굴을 쓸어내린 이치마츠가 대충 입을 떼었다.
“환영식은 다른 간부에게 맡기고 취침실 먼저 가는건 어때.”
“아니, 난 그냥 여기서 잘래.”
어느새 네 개의 머리가 한데모여 하나 둘 씩 기절하듯이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구름 낀 하늘에는 태양대신 달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 * *
“아, 이치마츠 형!”
그 쪽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냐! 과녁을 조준하던 토도마츠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눈에 씌어진 분홍색 고글을 집어 던졌다. 반 쯤 감긴 눈동자가 저 멀리 내팽겨쳐진 고글을 향했다. 이내 무심한 시선으로 다시 과녁을 향했다. 절규가 들려오건 말건 손에 들린 총에서 쏘여진 총탄은 다른 과녁의 정중앙을 정확히 향했다.
“악! 왜 자꾸 내 과녁만 맞추냐고!”
“오른쪽 사이드 연습도 해야 돼.”
탕ㅡ 탕ㅡ
사나운 총성이 연이어 울렸다. 토도마츠가 체념한 표정으로 정확히 중앙을 꿰뚫는 총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 이치마츠 형 사격 하나는 끝내주네. 초점 흐린 눈으로 과녁을 바라보다 어느새 들리지 않는 총성을 눈치 채고 이치마츠를 바라보았다.
“이제 안 쏴?”
“잠 다 깼어.”
아, 토도마츠. 네 고글 기스 난 것 같으니깐 알아서 하고. 이치마츠는 마지막 총탄이 떠난 총을 내려놓고 유유히 사격장을 빠져나왔다. 악! 내 고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절규가 들려왔다. 자기 화 주체 못하고 던진거잖아. 지만 손해지. 주머니에 손을 대충 우겨 넣었다. 곧 우겨넣은 손에 무언가 집히는가 싶더니 쥬시마츠가 좋아하는 레몬 맛 막대사탕이었다.
‘쥬시마츠 아직도 자고 있으려나..’
한숨 자고 일어나보니 세 시간이나 훌쩍 지난시간에 급하게 파티 소식을 다른 간부들에게 알리고 다짜고짜 토도마츠를 깨워 잠을 깨려 사격장으로 향했었다. 잠을 깨려는 이치마츠의 선택은 탁월했다. 거기다 주로 새벽에 움직일 작전을 위해 미리 수면패턴을 바꿔놓은 것도 꽤 도움이 되었다. 복도를 걸어가다 무심코 시계를 보니 시침은 새벽 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도대체 그 사람은 언제 온다는 거야, 벌써 하루가 지났는데. 대충 상황이나 알아보려 간부실을 향해 발걸음을 다시 옮길 때 였다.
뚝ㅡ.
‘뭐, 뭐야. 정전났나?’
주위의 전등이 순서대로 하나 둘 씩 꺼져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하고 이치마츠가 간부실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던 순간이었다. 허점 없는 재빠른 움직임이 그의 몸을 속박시켜버렸다. 계속 저를 쫓아왔던 것인지 숨통을 트는 소리를 내뱉으며 순식간에 목 안쪽을 겨눠오는 칼날에 조용히 손을 들었다.
“누.. 누구야.”
“너야말로 누구냐. 표식은 어디다 두고 간부실을 침입 하려는거야.”
표식..? 아, 설마 귀걸이를 빼버렸나. 하필 착용을 안 한 때도 이럴 때 라니. 무어라 변명할 수도 없는 명백한 실수다. 고글에 체이는 귀걸이가 거슬린다는 이유로 빼버린게 화근이었다. 바짝 날이 선 칼이 목 안으로 새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침착하게 펌프질을 하던 심박동이 급격하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뭐야, 뭐야 이 사람. 설마... 칼을 쥔 손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했지만 심하게 요동치는 온 몸이 행동을 거부하고 있었다. 연약한 피부 사이로 몽골몽골하게 맺힌 붉은 혈이 보이지 않는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도저히 성대를 울릴 수가 없었다.
“귀국하자마자 뜻밖의 수확이라니.”
“...허.. 큭.. 아니.. 이거..놔.......”
“멈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저를 위협하던 무기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서서히 들어오는 압박감에 점점 움츠려들던 몸에 활력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숨을 토하자마자 왈칵 쏟아지는 붉은 응어리를 손으로 받쳐냈다.
“아, 형님, 지금 이 자식이 간부실 침입을...!”
“저 녀석 간부 맞아! 상태는!”
“아, 갑자기 혈액이 돌아서 잠깐 쏟아져 나오는 것뿐이야.”
그런데 왜 귀걸이 착용을 안 한거지? 어느새 뛰어온 오소마츠가 이치마츠의 정체를 밝히고서도 당황한 기색 없이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심하게 일렁이는 땅을 힘겹게 버티고 서면서도 눈동자는 저의 목숨을 위협한 자에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의 목숨을 구제한 오소마츠가 맹수의 눈빛을 띄는 그의 팔을 어깨에 둘렀다.
“어이쿠, 카라마츠. 이 녀석 꽤 사나우니깐 당분간 힘들겠네.”
“아, 미안하다. 고의는 아니었어.”
붉은 발자국을 선명하게 남기며 힘겹게 부축당했다. 경련이 심하게 일어나는 몸을 부축하는게 영 쉬운일이 아니었다. 카라마츠는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다 오소마츠에게 재빨리 뛰어갔다.
“치료실로 갈 건가!”
“응, 당연하지.”
“그럼 내가 치료를..”
“...꺼져.”
호의를 뱉어내던 말 사이로 부정이 비집고 들어왔다. 부축하는 이, 치료를 원하는 이 모두 당황한 기색으로 이치마츠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혈액이 흐르는 푹 숙인 고개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걱정 섞인 한마디를 붙일 겨를도 없이 비수를 꽂았다.
“씨발, 말하기도.. 힘드니깐.. 네 새끼...는 꺼져.”
살인마 새끼. 어깨를 붙잡은 손이 서서히 내려갔다. 본의 아니게 신뢰도를 잃어버렸다.
* * *
매우 소박하고 급하게 준비한 파티는 엉망으로 끝나버렸다. 이치마츠에게 고글을 물어내려 따지러 가던 토도마츠가 간부실에 들어선 순간 폭죽과 함께 생크림 케이크가 그의 얼굴에 정확히 안착했다. 뒤이어 박수를 치며 들어오던 쵸로마츠도 케이크 폭탄을 맞아버린 장본인의 얼굴을 확인하고선 얼굴 근육이 서서히 굳어갔다. 아, 미안. 카라마츤줄 알고 무전을 쳐버렸네.... 그 뒤를 이어 어두운 낯으로 들어온 카라마츠의 인사로 이어지려던 계획은 철수되었다. 온갖 생크림으로 얼룩진 간부실을 급하게 치우고 이치마츠를 제외한 각자의 쌍둥이들이 자리에 착석했다.
“잠입요원, 카라마츠다.”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앞으로 같이 활동할 거니깐.”
“얘 참고로 의사야. 덕분에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어. 쿠데타도 내부에서 일어난 극비 소식이라 추측만 난무했는데 이 녀석 덕분에 정확히 정보를 습득했다고. 멋있지?”
그제서야 그 쪽 정보에 대해 정확히 꿰뚫어본 이유를 납득했다. 아무리 적진에 스파이로 잡입해도 들어오는 정보는 한계치가 있기 마련이다. 신뢰도가 급상승하는 직업이라 가능했던 거구나.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쥬시마츠가 입을 열었다.
“형은 어떻게 빠져나온거야?”
“단순해. 출장 간다고 나왔는데 아마 찾느라고 혈연이 돼있을거다.”
근데 국경 근처에서 한바탕 벌일 뻔해서 들켰을지도 모르겠군. 꽤나 담담한 어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을 받쳐주는 기둥 같은 존잰가. 그의 눈빛만 보고도 역할을 지레 눈치챘다.
“소피아(Sofia)로 갈건가?”
“엉, 베오(Beo)에서 토토코와 접선해야돼.”
“현재 상황으론 그 편이 낫거든.”
거기서 보급도 몇 개 받아가고, 혹시나 부상자 생기면 안되니깐.. 난생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이 속속 출연하자 토도마츠의 눈물샘이 심하게 자극되어갔다. 방울방울이 얼마나 고였을까,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형님들의 끝없는 토론을 따분하게 바라보다 못한 쥬시마츠의 의견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저 형아 많이 피곤해보이는데 자게 하자! 어느새 그의 턱 밑까지 내려온 다크써클의 유무를 확인하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끝마쳐 가는 분위기에 예상 못할 이가 손을 들었다.
“아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있는데..”
“음, 뭐지?”
“형도 게이에요?”
토도마츠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쵸로마츠의 입에 들어갔던 과자가 역류해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터져나오는 사례를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기침을 해대자 오소마츠가 괜찮다며 등을 세게 두들겨 주었지만 그게 도움이 되었을 리가. 저 녀석들은 도대체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짓을 해댄거냐. 빨간 분위기를 퐁퐁 풍겨대는 둘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처음으로 그의 썩소를 맛보았다.
* * *
“형아ㅡ. 형아.”
저릿해져오는 암흑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눈을 뜬 이치마츠의 동공이 크게 요동쳤다. 꿈 속을 헤매다 나온 안색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노란색 후드티를 입은 저의 동생이 늘어난 소매를 뚫고 차디 찬 손을 붙잡고 있었다.
“형 악몽 꿨어? 안색이 안 좋아..”
“괜찮아. 토도마츠는?”
“쵸로마츠 형한테 혼나고 있어.”
몇 시간동안.. 하하. 말끝을 흐리며 오른쪽 입 꼬리를 씰룩 올렸다. 갑자기 왜.. 앞 상황을 전혀 알 리가 없는 이치마츠의 머리위에 물음표가 새겨졌다. 또 섹스하는거 방해했냐? 보통 쵸로마츠 형은 안 혼내는데. 이 놈 머릿속부터 글러먹었으니 전무할 수밖에.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속사포로 내뱉은 말에 어색하게 머리를 긁은 쥬시마츠가 말을 이었다. 아 맞다. 형, 그.. 형이 와보래. 카라마츠 형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안 그래도 굳어있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머리를 헝클어대며 우악스럽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급변하는 이상한 태도에 쥬시마츠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지르는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왜 그래 형!”
“아아악! 그 새끼가 뭔데!! 날 찾아!!”
씨발, 죽여버릴거야! 저의 어깨를 꼭 잡은 동생의 손길을 무참하게 뿌리쳤다. 침상에서 급하게 일어나 탁자 위에 올려진 라이플을 들고 문을 소란스럽게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트일 것 같았던 시야는 무언가에 의해 막혀버렸다. 보이는 것은 하얀 벽이 아닌 붉은 정장이었다.
“여, 이치마츠.”
“씨발, 비..”
“형한테 이러면 안 되지.”
기세등등하게 문을 열고 나가려던 폭군은 이내 바닥에 곤두박질 쳐졌다. 질세라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허리 위에 정확히 안착한 리더는 꼴사납게 그를 밑으로 내리깔며 째려보고 있었다.
“총까지 들고 어딜 가려고?”
“.......”
“내가 널 이렇게 가르쳤나? 총 쓰는 법을 잊었어?”
정확한 사용법을 잊어버렸구나, 네가. 살벌한 웃음이 꼬리를 이었다.
* * *
저 조차도 혼란스럽지만 이치쥬시 아님니다.. :D
혹시나 눈치 못 채셨을 분들을 위해 덧붙이자면, 1편의 시점에서 바로 5년 후로 흘러갔습니다.
이번편에서의 오소마츠 성격이 더 맞다고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살벌할땐 한없이 살벌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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