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사보루] 첫만남 To.하뿌님

정루애 2016. 5. 1. 23:47



간만의 봄비였다. 형형색색의 우산이 복잡한 거리를 누볐다. 한 지붕아래 비좁은 공간 속으로 파고들어온 방울방울이 채 덮여지지 않은 어깨를 적시었다. 어깨를 잡아오는 손길에서 과분한 힘이 느껴졌다. 제 손이 더 젖어가는 것도 모르는지 채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꽤 큰 사이즈의 우산이었지만 옆으로 불어오는 비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보, 굳이 우산 하나로 나눠 쓸 필요도 없잖아..”

, 그때 일도 떠올려보고 좋잖아?”

그때? .”

우리 처음 만났던 날.”

 

그때 우리 꽤 젊었었는데, 그치? 사보의 물음에 흘리듯이 대답을 뱉었다. 그제서야 향수에 젖는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그 시절. 까마득한 옛날이야기처럼 파노라마가 스치운다.

 

유난히 지독하게 길었던 장마가 한참 활개를 부르던 과거의 어느 날 이었다. 중앙현관 앞에 나있는 하수구 밑으로 콰르르 내려가는 물줄기를 허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 바람과 사투를 벌였던 우산의 비참한 최후를 절규하며 쓰레기통에 떠나보냈다. 눈물의 작별을 하고 내려온 중앙현관은 이미 수많은 학생들이 하교를 한 뒤였다. 비참하게 하늘을 쳐다보아도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비가 더 내렸으면 내렸지, 아침보다 덜 내리진 않았다. 이걸 뚫고 가야하나, 고민하다 이내 생각을 굳혔다. 가방을 고쳐 매고 신발 끈을 동여맸다. 준비운동을 한답시고 목을 이리저리 돌리다 누군가의 눈과 마주쳤다. 마주친 짙은 화장자국이 선명하게 눈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요전에 급식 먹다 한번 마주쳤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내 시선을 거두고 그대로 달려 나가려는 손을 그가 붙잡았다.

 

너 몽키 D 루피. 맞지?”

? 어떻게 알아?”

매점에서 한정판 햄버거 싹쓸이 하고 다니는 애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 찔리긴 하다.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얼떨결에 다시 마주친 시선을 붙잡힌 손을 향해 돌렸다. 그제서야 손을 떼고 다시 입을 연다.

 

이 비바람에 어떻게 뛰어가려고. 너 비 맞고 가면 열병 나.”

우산 씌워주게?”

그럼 굳이 잡을 필요가 있겠어?”

 

그래? 그럼, 고마워! 긍정의 의사를 보내고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중앙현관을 나서자 촤악, 우산이 펼쳐졌다. 우산은 둘이서 쓰기에는 작아 보이는 사이즈였다. 이 녀석이 키가 커서 그런지 몰라도 딱 봐도 조금 크게 나온 1인용 우산이었다. 아무래도 맞고 가는 것 보다야 좋겠지. 문득 그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너 이름이 뭐야?”

사보.”

 

, 사보. 조로가 얼핏 검도부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는 부원이라고 말했었던 것 같다. 지금 고3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제야 눈에 띄는 파란명찰이 흐릿한 기억을 입증해주었다. 검도부로 시작된 화젯거리는 교문 앞까지의 긴 거리를 심심하지 않게 해주었다. 어느새 내 어깨위로 감싸진 사보의 팔은 그날따라 가뜩이나 기성을 부리던 추위를 막아주었다. 교문을 나서 집으로 가는 길까지 데려다 주려던 성의를 거절하려고 했지만 우연하게 행선지가 같았다.

 

, 사보. 중간에 마트까지만 데려다 줘. 우산 사게.”

, 괜찮은데?”

아침에 쓰고 오던 우산이 부러졌거든. 어차피 하나 새로 사는 김에.”

 

그래? 그럼 마트에서 기다려줄게. 호의가 가득한 녀석이었다. 꽤 좋은 녀석이잖아? 다시 대화를 나누다 금세 다다른 마트에서 우산을 접고 있는 사보를 바라보았다. 보자마자 입부터 벌어졌다. 그에 이어 경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 .. ..”

 

왼쪽 다 젖었잖아! 젖은 와이셔츠로 속살이 훤하게 비추었다. 바람까지 세차게 부는 상황에서 절대 춥지 않을 리가 없었다. 작은 우산인데 이상하리만치 비가 들어오지 않았다. 살짝 떨리는 사보의 어깨를 바라보는 내가 도리어 화가 났다.

 

미쳤어? 나보고 열병난다면서! 도리어 네가 열병 나게 생겼잖아!”

멀쩡하게 쓰고 왔으면 됐지. 괜찮아.”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툭툭 터는 손길이 참으로 무색해보였다. 말문이 턱 하니 막혀버렸다. 무어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뒤를 돌아 마트 안으로 들어가는 일 밖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미안함과 자책감이 미친 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냥 뛰어 갈 걸. 괜히 옆에 달라붙어서 피해만 줬잖아. 도리어 이 녀석이 열병에 걸리게 생겼다. 우산 대신 감기약을 찾아 나섰다. 마트 후문에 약국 하나 있는데 문이 닫혔을까. 다급한 심정은 이내 뜀박질을 명령했다. 뛰어 도착한 약국은 다행히 문이 열려있었다. 정신없이 집히는 감기약을 아무거나 사들고 사보가 기다리고 있을 정문으로 내달렸다.

 

먼저 갔으면 어쩌지. 아니, 내일이 있어. 근데 감기에 걸려버리면..'

 

못 보잖아. 그 생각 하나로 정문에 달했다. 자동문 옆으로 센서를 피해 서있는 사보의 뒷모습을 보고선 무작정 끌어안고 감기약을 손에 쥐어주었다. 흠칫 놀란 낌새가 역력했다. 등에 머리를 기댄 채 사보의 왼쪽 팔을 붙잡았다.

 

, 너 감기 걸리면 죽어. 나 지금 뛰어 갈테니깐 절대 쫒아 오지 마. , 만약에 감기 걸리면 1학년 1반으로 찾아와.”

 

그 말을 남기고선 무작정 집으로 뛰어갔다. 다행히 쫓아오는 발걸음은 들리지 않았다. 웃기게도 그렇게 선전포고를 해놓고 내가 심한 열병에 걸려버렸다. 3일 꼬박을 시체처럼 지내야 했다. 웃긴건 그 녀석도 학교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같이 감기에 걸려 결석을 했다는 건 다시 학교에 와서 조로에게 듣고서야 알았다.

 

“생각해 보니깐 보 형도 감기 때문에 결석했다던데.”

, 진짜?”

오늘 동아리 시간에 온다더라.”

 

아오, . 나 어디 좀 갔다 올 게. 어디에 가냐는 친구들의 말을 무시하고는 뒷문 밖으로 나가려고 발을 내딛었다. 단단한 누군가의 몸에 부딪혔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추돌사고다. 재빨리 사과를 건네고 다시 나가려 고개를 들어 그 장본인을 확인했다.

 

나 감기 걸렸어.”

.. .”

찾아오라며.”

 

미소를 훤히 지어보이며 감기약을 흔들었다. 이상하게도 캡슐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안도감에 웃음으로 화답했다. 그게 두 번째 만남이었다.


fin.